조선시대에도 패션디자이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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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패션 디자이너들

패션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말만 보면 현대에 와서 생긴 것 같지만 사실 사람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옷을 만들어 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런 직업이 존재했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임금의 의복을 만들거나, 궁중에 사는 궁인들의 의상을 공급하는 관료가 있었는데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러한 사람들이 오늘날 패션 디자이너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은 ‘상의원’이라고 불렸는데, 임금의 옷을 만들기도 하고 재화, 금은보화 등의 물품을 궁에 납품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이들은 조선 태조 때 설치된 뒤 그 후에 상의사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05년에는 상방사라는 호칭으로 다시 바뀌었다. 상의원의 일들을 보면 금실을 짜 넣는 재금장과 탕건을 제작하는 탕건장 등으로 나누어 마치 오늘날처럼 분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바느질로 옷을 짓던 장인을 부르던 명칭도 존재한다. 바로 침선장이다. 요즘은 장인으로 특별하게 지정해 그들의 기술력과 정신을 계승하고 보호하려 하지만, 전통 사회 안에서 옷 만드는 일 대부분 여성들이 가족과 자신들을 위한 살림살이의 일부분이었다. 

그러나 왕실, 또는 사대부 등의 특수 계층들은 자신들이 직접 옷을 짓지 않고 솜씨가 뛰어난 장인을 고용해 옷을 지어입곤 했다. 궁중에서는 위에 언급한 것처럼 상의원이 그 업무를 담당했고, 부족한 일손을 침선비라 하는 이들에게 돕도록 했다. 대체적으로 바느질에는 홈질, 박음질, 감침질, 상침뜨기, 휘갑치기, 사뜨기, 시침질, 공고르기, 솔기질 등이 있는데 이음새나 옷감의 종류에 따라 적용해야 하는 기술이 천차만별이라서 이들 장인의 역할은 까다로운 손님을 만날수록 더욱 빛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겠다.

(C) shutterstock / david-jun

 또 이들이 장인으로 지정된 특수한 인물들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침선장은 모두 양민과 천민 출신의 남성 장인이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상의원에 소속됐던 침선장만 68개 분야, 597명이나 됐다는 기록이 경국대전에 전해진다. 침선비는 바느질을 전담하는 침방과 수놓기를 전담하는 수방 소속 궁궐 나인을 뜻했다. 이들 중 누가 실제 의상디자인을 맡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침선장에 대한 사료는 그 숫자 정도만 남아있는 데 비해 침선비에 대해선 숫자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그 역할에 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침선비는 7, 8세 나인 가운데 손재주가 야무지고 꼼꼼한 성격의 사람을 가려 뽑아 도제식으로 기술을 전수했다고 한다. 업무 강도가 높아 손가락에는 바늘에 찔린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지만, 바느질을 못하면 그 책임을 물어 투옥되기도 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직업이었으니 어린 시절부터 그 고달픔이 심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심지어 침선비는 평소 옷을 짓다가도 궁중 연회가 열리면 춤과 노래도 담당했다. 침선비의 다른 이름이 ‘상방(상의원의 다른 이름)기생’이었던 이유가 여기에서 연유한다. 

옷을 만드는 일 뿐만 아니라 옷 세탁 역시 침선비의 몫이었다. 왕실의 옷은 비단 소재가 많아 세탁할 일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검소함을 중시한 중종과 영조, 정조 같은 임금은 제례복과 곤룡포 같은 옷 이외의 옷은 모시나 명주로 만들어 세탁이 가능하도록 하여 백성들의 진상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했다고 한다. 

이 당시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는 색깔은 보라색과 빨간색이었다. 그런데 보라색 염료인 자초는 그 가격이 근당 쌀 5~8말, 빨간색 염료인 홍화는 근당 쌀 10~11말에 이를 정도로 비쌌다. 이 때문에 세종 때는 사간원이 사치를 막는다는 구실로 왕실을 제외한 일반 백성들은 이 색깔의 옷을 입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또 침방 상궁이라는 이들도 있었다. 왕과 왕비가 옷을 편하게 입도록 해주며 잘 때는 평안하게 자도록 옷과 이부자리를 만들던 곳인 침방의 나인들을 맡아서 관리하는 책임을 가진 상궁들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왕과 왕비의 곁에서 옷 매무새를 손질해주고 옷을 입혀주는 등의 일을 하던 이들이 바로 침방 상궁들이다.

조선시대에 궁중이 아닌 곳에서 옷을 만드는 사람들을 통칭해 ‘침모’라고 불렀다. 풀어쓰자면 “남의 집에 속해서 바느질을 하고, 일정한 품삯을 받는 여자”라는 뜻이다. 지금은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예술가이자 또 성공한 사업가로서 크게 각광받고 있지만 이때만 해도 ‘사농공상’이라는 조선의 사회제도 때문에 전문 직업의 개념은 고사하고, 계급적으로 멸시를 받는 이들이 바로 침모들이었다. 

 

 역사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갖바치

신을 만들던 이들의 직업은 따로 ‘갖바치’라는 이름을 두고 불렀다. 이들 직업은 다양한 대중문화 코드에 자주 소환되고 있는데, 가령 홍명희의 <임꺽정>, 영화 <황진이> 등등 각종 영화와 드라마에서 이 직업을 관심 있게 다루고 있다. 

갖바치란 한 마디로 가죽으로 신을 만들던 사람을 뜻한다. 조선 시대에 목이 있는 신발은 ‘화’라고 불렸고, 목이 없는 신발은 ‘혜’라고 불렀는데 화혜장은 화와 혜를 만드는 장인이라는 뜻이었다. 당시로서는 천대받았을지 몰라도 이들은 모두 그 당시에나 지금에나 소중한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야 할 인재들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유명 갖바치 중에 황해봉씨 일가가 그 재능과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황해봉씨의 집안은 대대로 갖바치였다. 그의 할아버지 황한갑옹은 1973년 무형문화재 37호 화장 기능 보유자로 지정받았고 2003년에는 황해봉씨가 무형문화재 11호 화혜장으로 지정받아 가업을 인정받게 되었다. 황해봉씨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고종 황제의 평상화를 만들었으며, 고조부와 증조부는 순종 혹은 철종 연간에서 신을 짓던 사람이었다고 기록상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의 본적은 인사동인데, 궁궐과 가까운 이곳에서 장인들이 살며 왕의 신발을 만들었다고 한다. 

최근에 전통 화혜는 특별한 날의 의례용 신발로만 쓰이고 있다. 폐백에 남자는 목화, 여자는 당혜나 수혜를 신고 한복 파티에는 태사혜를 신는 것이 요즘 풍속이다.